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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그램/아이티, 음악의 전사들

아이티, 음악의 전사들


<아이티, 음악의 전사들>은 60여 년 동안 아이티에서 활동해온 셉텐트리오날 밴드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휘트니 도우 감독은 이 밴드의 곡절 많은 역사와 아이티라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겹쳐놓고 조망한다. 우리에게는 대지진의 재앙을 겪은 세계 최빈국으로만 알려진 아이티의 역사를 자세히 알려주는 이 영화의 관점은 흥미롭다. 아이티는 세계사에서 최초로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켜 제국주의 국가들을 물리치고 자기만의 영토를 세운 제3세계의 우등 국가였다. 전쟁에서 패한,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열강의 집요한 공세가 지속되고 부패한 아이티의 지배 엘리트들이 서구 외세와 결탁하면서 20세기 중반 이후 아이티의 경제는 철저하게 무너졌다.

무지한 제3세계의 또 다른 지식인의 눈으로 보기에 <아이티, 음악의 전 사들>에 담긴 그 나라 민중의 수난사는 믿기 힘들 만큼 극적이다. 셉텐트리오날 밴드의 생명력은 불우한 아이티 민중의 삶과 밀접하다.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을 좋아했고 그들의 음악으로 위로받았다. 영화는 이 밴드를 현대화하려는, 미국에서 확보한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새 지휘자와 밴드의 오랜 멤버들의 불화를 슬쩍 다루면서 아이티라는 나라만큼이나 변하지 않았고, 노쇠한 이 밴드의 현재를 보여준다. 감독은 어떤 지점에서도 일방의 편을 들지 않는다. 이 균형감이 관객을 많이 생각하게 한다. 밴드의 구 멤버들은 밴드의 음악적 지향이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춰 변해가는 걸 힘들어한다. 심지어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다가 무대를 내려가는 고참 가수도 있다. 밴드 내의 신구 갈등의 해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이티, 음악의 전사들>의 주제는 아니다. 그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갈망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좌초된 아이티라는 나라의 운명과 겹친다.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독재자 뒤발리에 부자가 2대에 걸쳐 정권을 유지하는 동안 셉텐트리오날 밴드는 독재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바쳤고, 대다수 민중은 그걸 들으며 흥겨워했다. 이 밴드의 운명도 군사 쿠데타가 서른네 차례나 일어날 만큼 불안한 정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할아버지가 된 밴드의 구 멤버들은 공연을 하다가 총격을 받아 죽은 동료들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셉텐트리오날 밴드는 외세 의존적인 매판 독재 정권에 철저하게 종
속당했지만 동시에 권력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흥과 아름다움과 용기를 주었다. 영화가 제작될 당시 일어난 아이티 대지진으로 나라가 대재앙을 맞았을 때 전기 공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지휘자의 집에 모인 밴드 멤버들은 국민들에게 용기를 줄 새 노래를 만든다. 이 밴드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가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지만, 동시에 그 와중에 음악적 정체성을 지키며 아이티 사람들의 삶의 리듬을 지탱해주는 예술의 그것이다. 그들의 음악은 직설해낼 수 없었으나 그들의 음악은 국민의 80%가 하루 평균 2달러에 못 미치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정서적 피난처다. <아이티, 음악의 전사들>을 보는 감흥은 묘하다. 서구의 재즈와 같은 음악으로도 수렴하기 어려운 독특한 에너지를 가진 아이티 음악의 저류를 만끽하게 해주는 가운데 외세에 굴복해 자신들 고유의 생산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쓰레기 더미와 잿더미에 묻혀 재앙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불우한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제국주의 역학의 가장 끔찍한 희생지로서 아이티를 대하는 한편, 그들의 강력하고 개성 있는 음악이 이 불우한 땅의 운명에서 생겨나고 지탱되는 것이란 아이러니를 곱씹어보게 된다.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며 지적이면서 정서적으로 풍부한 여운을 남기는 다큐멘터리로서 <아이티, 음악의 전사들>은 특이한 성취를 이뤄낸다. 하나의 특정 대상을 놓고 이렇게 씨줄과 날줄로 구성했는데도 탄탄한 극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관객을 생각하게 만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좀처럼 해내기 힘든 성취일 것이다.

Writer 김영진(영화평론가)
마리끌레르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