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프로그램/치코와 리타

치코와 리타


<치코와 리타>는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중요하다.

통속한 스토리와 슬렁슬렁 건너뛰는 전개 방식에도 이 영화가 주는 매혹의 질감은 애니메이션의 그림체와 움직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치코와 리타 두 남녀 주인공이 하룻밤 연인 관계에서 평생을 두고 인연의 끈을 맺는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그날, 리타가 벗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방금 떠오른 악상을 피아노로 치고 있는 치코에게 다가가는 초반 장면에서 어떤 관객은 이 매혹적인 그림자놀이에 금방 항복하고 싶어질 것이다. 스르르 미끄러지는 듯한 주인공들의 움직임에 실리는 재즈의 초현실적인 운율이 주는 감흥이 숱한 노랫말들이 읊조리는 감상적인 사랑 타령의 절실함과 결핍감과 갈구와 경험하기 쉽지 않은 환상의 유토피아를 자연스레 그려내기 때문이다.

실제 인물의 동선을 캡처해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했다지만 <치코와 리타>가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비현실적이면서도 언젠가는 경험할 수 있을 듯한 기시감을 준다. 이 몽환적인 현실성을 단단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 재즈 음악이다. 쿠바 출신의 전설적인 음악인 베보 발데스가 작곡에 참여한 <치코와 리타>의 배경음악은 문외한도 그 자체로 최고라 생각하게 만든다. 매일 클럽에서 밤을 지새우며 보내는 인생이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관계는 영속적이지 않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쿠바의 아바나와 미국의 뉴욕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빛바랜 필름으로 대하는 것처럼 고색창연하며 동시에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은 순진함을 내세운다. 숱한 시간을 타의에 강박당한 채 운명적인 사랑을 미루어야 하는 운명이라는 남녀 주인공의 사연은 재즈 음악의 정조와 어울린다. <아름다운 시절> 등을 연출한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은 <치코와 리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굵게 추상화된 아바나와 뉴욕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그려낸다. 아바나라는 고향은 따뜻하지만 가난하고 뉴욕은 풍요롭지만 차갑다. 한쪽은 자발성과 즉흥,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이 만개한 공간이고, 다른 한쪽은 비즈니스 전략과 거래, 흔들리지 않는 프로페셔널리즘이 미덕이 되는 사회다. 치코와 리타의 사랑은 삶의 성공을 위한 그들의 또 다른 욕망과 양립하기 힘들다. 그들은 자신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각자 너무 멀리 가버리지만 그럼에도 다시 처음에 느꼈던 충만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기다린다.

정해진 선율대로 진행되지 않는 재즈의 즉흥 연주와 달리 <치코와 리타>에 담긴 세계는 낡은 운명론과 신파의 세계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건 그들의 삶과 음악이 정해진 굴레에 포박당하는 것을 끊임없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수하지만 곧 실수를 깨닫고 원래의 자기 기질대로 살기를 꿈꾼다. 치코와 리타 외에도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의 일화를 자연스레 섞으면서 이 영화는 일탈과 방종이라는 호방한 삶의 태도와 순정과 의리라는 전통적인 덕목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뮤지션과 인간으로서의 갈등을 물 흐르듯이 봉합한다. 영화에서, 치코와 리타는 아름답고 충만했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쭈글주글한 피부를 감추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하게 조우한다. 그들의 삶은 그리움과 결핍으로 채워졌다. 그렇다고 그들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결핍은 그들의 갈망을 만들었고, 그들 곁에는 늘 음악이 있었다. 채워지거나 모자라거나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것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마모되고 왜곡되는 것들에 저항한다.
 
치코와 리타가 그랬다. 이 지극히 통속적인 영화에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진심이 있다. 그 곁에는 물론 친구처럼 다정한 음악이 있다. 최고의 재즈 음악이.

Writer 김영진(영화평론가)
마리끌레르 2월호

'영화 프로그램 > 치코와 리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코와 리타 Chico and Rita  (1) 201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