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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그램/원스 어게인

원스 어게인

그와 그녀는 사랑 앞에서 머뭇거린다. 남자는 과거의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자는 앳된 얼굴이 무색하게 아이가 있는데다 고향 체코엔 별거 중인 남편이 있다.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음악으로 감정을 나눴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없는 사이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면서도 둘은 상대방을 원한다. 그들이 입을 맞춰 부르는 ‘Falling Slowly’의 가사 첫 구절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그래서 더욱 애절한 두 사람의 연심을 드러낸다. ‘나는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을 원합니다...(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어쩌면 사랑은 서로를 잘 몰랐을 때 더 간절한 것인지 모른다.

빈곤한 삶을 음악으로 버텨내는 남녀의 사연을 그린 <원스>(2007)는 그렇게 사랑의 설렘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표현하며 관객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켰다. 저예산으로 소박하게 만들어진 영화는 큰 반향을 불렀고, 영화의 OST는 미국에서만 70만 장이 팔렸다. 그와 그녀를 각각 연기한 뮤지션 글렌 한사드와 마르게타 이글로바는 ‘Falling Slowly’로 2008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 주제가상을 함께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영화 같은, 휘황한 현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사드와 이글로바는 영화에서 못 이룬 사랑을 현실에선 맺게 됐고, 서로에게 반려자로서 함께하는 삶을 맹세하게 됐다. 듀엣 ‘스웰 시즌’으로 음악적 동지가 되어 함께 세계를 주유하는, 남들이 한없이 부러워할 삶이 이어졌다. 과연 그들의 유난스러운 사랑은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원스 어게인>은 한사드와 이글로바가 스크린 밖에서 만들어낸, 실제 삶의 궤적을 좇는다. 달콤한 가사와 절절한 영화 속 사연과 달리 현실의 사랑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져 있고, 관객의 환호가 들리지 않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무대 뒤를 비추며 사랑이 남긴 숙취를 전한다. 시종 흑백으로 두 사람의 험난한 감정의 여정을 묵묵히 따라가다 결국 감정의 파국과 마주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쓸쓸하다. 요컨대 <원스 어게인>은 <원스>가 만들어낸 사랑의 판타지에 각성제 구실을 하는 영화다. 영화 초반부는 기대와 희망에 차 있다. “과연 오스카를 수상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삶은 어떨까”라며 한사드의 어머니는 들뜬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2년 동안 이어지는 세계 순회 공연 와중에 한사드와 이글로바 사이에는 균열이 생긴다. 세상사가 새삼스럽지 않은 마흔 줄의 남자와 특별한 삶을 원하는 20대 초반의 여자는 감정의 접점을 쉬 찾지 못한다. 음악적 성공에 집착하는 한사드는 긍정적으로 매 공연에 임하려 하나, 틀에 박힌 공연에 지친 이글로바는 “스타 놀이 같은 거 적응이 안 돼요”라며 얼굴을 잔뜩 구기기 일쑤다. 현실을 바라보는 둘의 상반된 시선은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든다.

급기야 두 사람은 돈을 두고 신경전을 펼치기까지 한다. “돈 버는 족족 (이글로바가) 벗겨 먹었다”는 한사드의 감정 섞인 한마디만으로도 <원스>의 예쁜 사랑은 쩍쩍 금이 간다.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된 뒤 관계가 뒤틀리는 두 사람, 그들에게 변함없는 것은 그저 노래뿐이다. 사랑은 빛바래고, 삶은 퇴락해도 그들의 노래는 계속된다.

쓸쓸하고 쓰디쓴, 관계의 종말이 이 영화의 끝을 장식하지만 영화는 외려 아름답다. 걸어야 할 인생길이 각기 다름을 깨달은 두 남녀가 순순히 서로를 위해 길을 터주는 모습은 마음속에 공명을 일으킨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이별은 가슴을 치지만 그리 애달프지는 않다. 서로 감정에 솔직해서 얻은 결과이기에 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무대 위에 오를 수 있다. 어차피 삶은 혼자이기에, 어쨌든 둘은 삶의 절정을 함께 나눴기에, 그리고 둘의 존재 이유는 음악이기에 이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고 영화는 조용히 읊조린다.

허구로 짜인 <원스>보다 다큐멘터리 <원스 어게인>이 더 오랜 여운을 주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Writer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마리끌레르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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